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태우 정부 (문단 편집) == 정치/사회 == 취임 초기부터 임기 두달째인 1988년 4월 26일 [[13대 총선]]에서 집권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이 원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헌정 사상 첫 [[여소야대]] 정국이자 [[평화민주당|4]][[통일민주당|당]] [[신민주공화당|체제]]가 형성되어 여/야 내부에서 5공 청산과 관련하여 압박을 받았다. 여기에 [[노태우]] 본인이 자신의 친구이자 5공의 실세인 [[전두환]]과 5공을 수립한 핵심 측근이었다는 전력이 일종의 원죄로 작용하여, 집권 내내 지지도가 부족했던 노태우 정부는 대통령 주도의 힘있는 정책 드라이브를 펼 수 없었고 대통령의 권한도 이전보다는 많이 약해졌으며 대신 치안에 공을 들여 [[10.13 특별선언|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내부적인 치안유지를 꾀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서서히 불어닥친 민주화에 대해 보수 기득권자들은 안 좋게 봤고, 집권 초엔 [[오홍근 테러사건]] 같은 백색테러가 주를 이뤘다. 1989년에 판세를 반전시킬 목적으로 공안 정국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세를 역전시키려 했고, 당시 재보궐선거에서의 참패로 궁지에 물려있던 [[통일민주당|민주당]]의 [[김영삼]]과 [[민주정의당|민정당]]과의 차별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의 [[김종필]]과 [[3당 합당]]을 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개혁 정책이 크게 후퇴한 데다가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당내 계파갈등과 연이은 날치기로 지지율은 낮았으며, 특히 1990년 5월 29일자 중앙일보에 '내각제 합의문서 작성'이 폭로되고 10월 25일 사본이 공개되면서 갈등이 더해졌다. 문화적으로도 집권초기에는 대통령과 정치인이 개그프로그램에서 소재로 쓰여지게 되었고, 문화와 가요검열이 완화되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 및 MBC 리포트처럼 이전에는 나올수 없는 수위의 TV프로그램이 나왔을 정도였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교복이 대세가 되고,[* 다만 이 당시에는 교복이 대세가 되는것은 이 당시의 학부모들과 교사 사이에서 돈이 학생지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교복을 부활시키자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여학교에서는 매일같이 옷을 고르는게 귀찮다는 이유로 차라리 교복을 입는게 낫다는 식의 여론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교복이 재도입된 이후로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는 식의 불편이 제기되거나 교복의 가격이 비싸져서 사복입는것보다 나을게 없다는 여론이 퍼졌음에도 정작 교복재도입을 주도한 교육게에서 교복의 개선 및 교복재자율화에 대해 계속해서 뭉개다보니 교복이 불평불만의 대상이 된것이었을뿐이었다. ]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이 벌어지는 등 보수휘귀 경향이 강해졌다. 1990년 12월 내각제 지지자인 노재봉 총리의 취임 뒤 1991년에 낙동강 페놀사건이 터지고 수서 비리 등 부정부패 사건도 속출하다가 높은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문제가 되어 1991년 광역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이 대패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후에 조작으로 밝혀짐.]과 정원식 전 총리 계란 투척 사건으로 세를 역전시켰고, 투표율도 58%로 낮게 나오면서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의 내분이 벌어지고 각종 공작이 들통나며 1992년 총선에서 [[민주자유당]]은 149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며 급속히 레임덕에 빠졌고, 이때를 기점으로 [[상도동계|민주계]]의 수장 [[김영삼]]에게 실권을 넘기게 되었다. 언론자유화를 통하여 보다 자유로운 언론 보도가 허용되었다. 1987년 11월 28일 언론기본법을 폐지해 보도지침을 내리던 문공부 홍보조정실을 없애는 한편 프레스카드제와 1도 1지제를 폐지하고 언론사 설립요건을 완화시켜 언론사 수가 늘었으며, 각 언론사에 노조가 설립된 것도 노태우 정부 때였다. 언론 자유는 비약적으로 향상되었고, 이에 [[미국]] 프리덤하우스가 1990년에 "언론 자유국" 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3당 합당]] 직후에 [[서영훈]] 전 사장에게 압력을 가해 퇴진시키고 [[서기원]] 전 사장을 임명시킴으로써 [[KBS]]를 다시 친정부적인 성향의 언론으로 만든 일이나 [[우리가 남이가]] 사건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등에서 보이듯 공작 정치가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으며 메이저 언론의 '자발적'(...) 편향성도 존재했다.[* 실제로 명절 때만 되면 여당 정치인들과 정치부 기자들에게 명절선물로 용돈(...)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이를 토대로 메이저 언론에서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게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궁핍한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일정 수준의 용돈을 주기도 했다고(...) 더군다나 3당 합당 이후로 술값과 택시비를 잘 쏘기로 유명한 김영삼이 민자당에 합류하면서 효과는 배가 되었다. 당시 정계와 언론계 사이에서 얘기가 노돌았던 김영삼 장학생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여담이지만 당시 유력 대권주자였던 김대중을 비판하거나 마타도어하는 기사가 많이 나왔던 이유 중 하나가 기자들에게 한 턱 쏠 때 꼼꼼하게 계산하면서 술값과 차비를 내주는 습관때문이었다고 한다.(...) 뭐, 김대중의 측근 인사중 하나였던 박지원은 기자들에게 술값과 차비를 펑펑 싸주어서 대중적인 인기는 없어도 기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말이다.] 또한 조중동 같은 일부 메이저 언론들의 권력화도 심해져 1992년 14대 대선 때 '정주영 때리기' 보도 등으로 정권교체의 방향을 점칠 정도까지 진화했다. 정치공학 측면에서는 [[3당 합당]]이 이뤄지며 [[민주자유당]]이 거대 여당으로 재탄생하여 [[민주당계 정당]]들과의 양당 경합 체제가 자리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